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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재인 (4~6) 소설가 김동리에게 ‘외상 입학’ 청원한 문학 소년
[역경의 열매] 이재인 (4) “애머슴 안 되게 해주세요” 우물가서 간절한 기도 박윤서2026. 6. 11. 03:07 물 긷는 핑계로 우물가에 가 기도 마음 속 서울 사는 고모댁 갈 결심 국민학교 졸업장 받는 날 상경 감행 고모가 찾아낸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애머슴으로 보내질 운명에 처하게 됐다. 애머슴 팔자가 될 위기에 처하자 나의 기도는 시작됐다. 당시 내 기도처는 우물가였다. 당시로써는 교회가 멀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쉽게 다닐 수는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수도는 꿈도 못 꿨고 마당에서 펌프로 우물을 퍼내는 것도 없었다. 이른바 ‘뻠뿌’는 그보다 한참 뒤에 생겨났다. 대신 마을에 동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그곳은 가까웠고, 또 우물에 가는 일은 합법적(?)이었다. 물을 길어온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나는 물을 긷기 전에 우물가에서 기도를 드렸다.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서 봤든지 아니면 DNA에 각인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조상들도 무언가를 빌 때 꼭 정화수를 떠놓고 빌지 않았던가. 6학년이 되자마자 나는 애머슴의 처지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당시 나로서는 나름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남들이 우물가에 나타나기 전에 정성껏 두 손을 모으고 교회에서 배운 대로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중에 이런 계시가 주어졌다. “머슴살이는 네가 갈 곳이 아니다. 졸업하는 대로 너희 넷째 고모가 사는 서울의 돈암동으로 가려무나. 가면 길이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낸 머릿속의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음성이 들려왔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소리였다. 그날부터 나는 고향 탈출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고모님 댁의 주소와 약도를 베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는 정류장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졸업식 날. 나는 충남 교육감상 수상자로서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상은 뒷전, 나는 졸업장을 받자마자 곧바로 도보로 12㎞ 떨어진 홍성역으로 직행했다. 어머니가 알아볼 수 있게 간단한 메모를 남겨 아침에 쌀독 안에 넣어 두고 나왔다. 저녁이 되면 온 식구들이 내 행방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손에는 짚으로 엮어 짠 계란 한 줄이 들려 있었고 보따리에는 서리태 검은 콩 한 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 무작정 상경의 전 재산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후의에 힘입어 난생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 겁을 집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충청도 시골 촌닭임에는 틀림없었다. 돈암동 고모님을 찾아뵀다. 나의 무작정 탈출기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신 고모님께서는 “무어라도 기술이 있어야 밥을 먹는겨. 그러니 하루 이틀만 머물러 봐. 내가 한번 알아볼 테니께” 하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고모님은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셨던 듯하다. 그런 끝에 내가 먹고 자면서 일을 배울 수 있는 공장을 구하는 데 마침내 성공하셨다. 고모님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신 저녁, “여기서 멀잖은 곳에 돈암동 굴다리 인근에 자동차 수리 공장에 자리가 났다고 하드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다음날 그곳에 가보았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자동차 정비소’였다.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 정비소는 오늘에 비하면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자동차에 ‘빠데(퍼티·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재료)’를 먹였다. 그 빠데가 마른 다음에는 ‘뻬빠(사포)’로 문지르고 그 판판해진 철판에 색을 칠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한 전동 도구도, 미끈한 재료도 없었다. 작업장 환경도 정말 형편없었다. 나는 그곳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참고 일했다. 고향에 돌아가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려면 참고 견뎌야 했다. 먹고 재워주는 데다가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재인 (5) 정비소 사장 임금체불에 공부까지 눈치… 이직 위해 기도 박윤서2026. 6. 12. 03:07 성실했던 날 눈여겨본 손님 덕에 파이프 용접 공장에 조수로 재취업 2년 공부 끝에 중등 검정고시 합격 감격에 겨워 교회 예배 성실히 출석 내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고 학업을 장려할 줄 알았던 사장님은 내 순진한 예상과 달리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일자리를 구할 때 여기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워 회사에 작은 보탬이 되겠다 서약했으니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을 수도. 그렇게 1년간 월급도 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기숙사에서 밤에 공부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나는 기숙사에서 함께 일하던, 충청도 웅천에서 올라온 동료 배인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님을 영접했다고 했다. 기숙사 천막 안에서 인수와 함께 밤샘기도에 돌입했다. 기도 제목은 자동차 정비소를 떠나게 해달라는 거였다. 머슴살이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에서 정비소를 떠나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뀐 거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먹고 재워주는 기숙사는 내게는 서울에서 머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곳이기도 했다. 기도의 응답 결과였을까. 인수의 기도와 나의 간절함에 힘입어 나는 정비소를 벗어나는 기회를 얻게 됐다. 정비소에 자주 출입하던 40대 후반의 손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내가 정비소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호의를 베풀었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내가 두 번째로 얻은 직장은 파이프를 산소 용접하는 곳이었다. 용접으로 붙인 부분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페인트칠하는 단순노동이었다. 을지로3가에 있는 공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었다. 기술자 염씨는 아침 8시에 출근, 오후 6시에 퇴근을 했다. 나는 그분의 조수로서 시키는 일을 꼬박꼬박해냈다. 그렇게 2년 만에 중앙강의록을 성실히 공부했기에 그해 검정고시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결과는 합격.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나는 아쉬운 대로 중졸의 자격을 갖게 됐다. 애머슴이 대처에 나가 산소 용접 기술을 획득하고 중학교 졸업 자격을 얻었다는 것은 내 생애에 두 번째 기도의 응답이었다. 나로서도 피 튀는 노력과 열정이 있었고 이로써 나는 애머슴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무임금 기숙생에서 유급 기술자가 됐다. 이때 나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사해 벧엘교회에 다시 출석했다. 그때 담임은 박덕종 목사님이셨다. 내 생활이 궁핍하고 절실한 소망을 가진 근로 소년이었지만 열심히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자고 나면 새벽 예배, 수요 예배를 꼬박꼬박 빠짐없이 출석하는 나를 박 목사님께서 자주 안수해 주셨다. 믿는 자에게 안수와 기도, 성령의 뜨거운 체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지금 생각해 본다. 이렇게 내 믿음은 객지에서 조금씩 자라갔다. 용접 기술, 파이프 땜질, 자동차 빠데(퍼티) 먹이는 기술을 보유한 나는 어느새 어엿한 기술자가 됐다. 나는 돈을 벌게 되면 예배당을 짓겠다는 나름 소박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생기는 대로 서울 시내 교회 기행을 나서기도 했다. 우리 개신교도 명동 성당처럼 서울 한복판에 세워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이야 크고 멋진 교회가 많이 있지만 그때는 그런 꿈을 가질 만했다. 나는 출석하는 예배당이 장차 멋진 교회로 탈바꿈하는 것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집을 나서기 전, 일터에서도 나의 기도 생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땅의 그런 기도들이 모여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이뤄지는 초석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재인 (6) 소설가 김동리에게 ‘외상 입학’ 청원한 문학 소년 박윤서2026. 6. 15. 03:10 머슴살이 불안 속 기도로 버틴 삶 오영수 작품 독후감 내자 반응 일어 오 선생이 찾아와 추천할 뜻 밝히기도 위험 인지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이 지금까지 생존하며 발전할 수 있었을까. 위험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신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다가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 진단을 받거나 수술을 하게 될 때 그들은 자기의 한계 앞에서 신을 찾게 된다. 나 또한 고향의 아버지 손에 이끌려 머슴살이를 가야 했다. 머슴이란 일이 그 자체로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유가 없는 일이다. 주인이 시키는 노동에 시간과 체력을 쏟게 되면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날 찾으러 서울로 오시게 되면 나는 다시 머슴으로 붙들려 가게 된다. 그것이 나의 고질적인 불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기도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불안감이 없었다면 기도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얄팍하고 가볍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기도는 나 개인의 유일한 동아줄이었고 무기라면 무기였다. 그것에 의지해 나는 청소년기에 처음으로 인생이라는 배에 돛을 올린 셈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걸 의식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나는 ‘이승만 대통령 82회 탄신 기념 전국 글짓기 대회’에 응모해 군내 수상을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괴이한 대회임에 분명하지만 그 시대에는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국립경찰 창립 17주년 예산군 내 글짓기 대회에 참석해 1등을 수상했다. 이런 과거 경력을 지녔던 터라 대학에 진학할 때도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제자 중 두 학생이 문예창작과 학생이었는데 방학 중에 그들이 선생님을 뵈러 온 일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 제자들을 자랑하곤 하셨다. ‘나도 저 형들처럼 2년제 서라벌 예술대에 가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서울대 농과대에 재학 중인 앞집 형에게 ‘사상계’나 ‘현대문학’에 실린 소설을 읽곤 했었다. 그 가운데 오영수라는 작가의 ‘기질(氣質)’이란 단편을 읽은 적이 있었다. 농민소설이라서 그런지 나에게는 진한 감동을 줬다. 그 독후감을 ‘현대문학’ 편집부에 보냈다. 뜻밖에도 오영수 선생님이 답신과 함께 당신의 창작집 ‘머루’를 한 권 보내주셨다. 오 선생님의 글을 여러 번 읽고 나자 당신이 낚시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가 살던 곳이 예당 저수지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을 오 선생님께 알려 드렸다. 내 편지를 받으신 선생님은 나의 초청에 낚시하러 오시겠다는 답신을 보내오셨다. 그리고 진짜로 예당 저수지에 오셔서 낚시하시고 가난한 우리 집에서 하루 묵고 가신 일도 있었다. 그때 오 선생님께 나의 소설 지도 선생님이 돼 달라는 부탁도 드린 일은 없었지만 나는 이미 그분의 문하생처럼 돼 있었다. 서울에서 지내면서 공장에서 쉬는 날 오 선생님이 사시는 성북구 쌍문동 산298번지로 찾아뵀다. 나는 여러 말끝에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고 서라벌 예술대에 문예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시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흔쾌히 “자네가 요청한 대로 김동리 선생께 편지를 써 줄 터이니 가서 의논해 보라”고 하셨다. 허위허위 돈암동 산 8-3번지로 찾아가 서라벌 예술대 문예창작과장 김동리 선생님을 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자네가 장학생? 거 신춘문예 당선이나 문예지 추천을 받은 일이 있는가. 그게 규정인데….” “그것은 내년에 제가 당선하고 올 테니 외상으로 입학을 먼저….” 공돌이 주제에 ‘외상 입학’이라는 용어를 들은 김동리 선생께서는 아연실색하는 표정이셨다. “외상 입학이라고?”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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